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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People_송신도 할머니&‘재일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사람들

by Banglee 2009. 2. 2.


“바보 같은 전쟁은 두 번 다시 하지 마라!”

격렬한 성격. 날카롭고 거침없는 입담.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그녀는 알고 보면 농도 잘 던지고, 잘 웃고, 화도 잘 낸다. 7년간의 위안부 생활, 그리고 일본 정부의 사죄를 요구한 재판. 지원모임과 함께 한 10년의 시간 속에서 진짜 모습을 찾아가는 그녀를 만난다!

  송신도 할머니 

송신도 할머니는 일본의 식민 통치하에 있던 1922년 조선 충남에서 태어났다. 16살, 부모가 정한 결혼이 싫어서 혼례를 올린 첫날 밤, 신랑에게서 도망쳐 가출했다. “전장에 가면 결혼하지 않고도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위안부가 된 그녀는 중국 중부 무창의 ‘세계관’이라는 위안소에서 일본군의 “위안”을 강요당했다. 옆구리와 넓적다리에는 당시 군인에게 칼로 베인 상처가, 팔에는 ‘가네코(金 子)’라는 위안부 당시의 이름 문신이 그대로 아직 남아 있다. 군인에게 맞아 고막이 찢어졌지만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현재는 보청기 없이는 잘 들을 수도 없다. 위안소에서 두 남자 아이를 출산했지만 키울 수가 없어 하는 수 없이 남에게 맡겼다.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일본 군인의 꼬드김으로 일본으로 가지만, 하카타로 쫓겨나고 그 후 재일조선인 하재은과 만나 미야기현에서 살게 되었다. 일본에 생존하고 있었던 위안부 피해자의 첫 제소였던, 1993년 4월 5일 소송 이후 각지에 초청되어 증언, 강연, 대담을 하고 한국, 필리핀 피해자들과 함께 국회 앞에서 농성과 시위에 참여해왔다. 1997년 12월 제9회 타다요코반권력인권상을 수상하였다.


“할머니, 다 같이 약속해요! 다 같이 하는 거예요!”


‘재일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사람들

‘재일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은? 그들이 송신도 할머니를 알게 된 것은 1992년 1월에 개설된 신고전화 “위안부 110번”을 통해서였다. 그 후 할머니가 재판을 하기로 결심할 때까지 1년의 세월이 필요했고 같은 해 말, 재판을 하겠다는 할머니의 의사에 따라 다음해(93년) 1월 23일, 재판은 물론 재판 지원 같은 것을 해본 적도 없는 시민들이 모였다. 대표도 두지 않고, 사무실도 두지 않고, 상근 직원도 두지 않는 ‘3무(無) 원칙’에 따라 ‘재일 조선인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지원모임은 할머니와 함께 했던 수많은 강연과 집회를 빠짐없이 기록해왔다. 이것은 결국, 안해룡 감독이 그들에게 다큐멘터리 제작을 제안하게 된 동기가 된다. 지원모임이 결성될 당시 1살이던 멤버들의 아들, 딸이 이젠 14살이 되었다. 그들이 송신도 할머니를 가족처럼 함께 한 세월도 15년이 넘는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그들은 지금도 한 달에 한번 모임을 계속 하면서 회보를 제작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일본 각지의 시민단체를 통해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가 상영되는 것을 물심양면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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