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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아시아에서 10대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썸머프라이드시네마2018'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인디토크 기록

by indiespace_한솔 2018. 8. 9.

 





아시아에서 10대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썸머프라이드시네마 2018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18년 7월 27일(금) 오후 7시 30분 상영 후

참석 민규동 감독 | 배우 이영진

진행 장성란 영화저널리스트







*관객기자단 [인디즈] 윤영지 님의 글입니다. (사진제공 신소영 님)




인디스페이스와 서울프라이드영화제가 함께 개최한 썸머 프라이드 시네마 2018’의 첫 상영작은 민규동, 김태용 감독의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였다. 20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통과한 영화와 관객이 극장에서 만났고, 그 무엇도 변하지 않은 영화 속 풍광과 목소리와 표정들을 다시금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벅찬 경험이었다. 영화가 끝난 뒤 민규동 감독, 이영진 배우와의 인디토크가 장성란 저널리스트의 진행으로 이어졌다.


 




장성란 영화저널리스트 (이하 장성란):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상영은 저에게도 의미가 남다른데요. 학교 다닐 때 교복을 입고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거든요. 당시 한국 영화에서 제가 다니던 여중, 여고의 교실 풍경을 이렇게 실감나게 그린 영화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서, 그 느낌에 압도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20년 만에 영화를 스크린으로 보니 어떠셨나요?


민규동 감독 (이하 민규동):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는 것도 신기하고, 가장 크게 든 생각은 도대체 이게 무슨 영화지? 어쩌다가 이런 영화가 태어났을까? 영화여, 나에게 설명을 좀 해줘봐’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성적, 논리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불균질하고 복잡한 에너지가 기적처럼 수많은 우연과 필연 속에서 이상하게 만들어진 느낌이라고 할까요? 긴 시간의 거리를 두고 다시 마주하니 너무 설레고, 한 편으로는 슬프기도 하고, 신기한 경험의 순간이었어요.


장성란: 이영진 배우님께서는 영화를 보신 기분이 어떠신가요?


이영진 배우 (이하 이영진): 19991224, 서울극장, 당시 이 곳이었거든요.


민규동: , 이 곳이었어요. 개봉 날 이 건물에서 개봉 무대인사를 했어요.


이영진: 그 당시는 연기자가 무엇인지, 배우가 무엇인지 잘 몰랐던 나이였어요. 개봉 날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에 3층 카페에 줄 서 있던 관객분들을 보며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던 걸 기억하고 있어요. 그게 1999년도입니다. 세기말이었어요, 여러분.(웃음) 그렇게 세기말에 영화가 개봉하고 19년이 흘렀네요.


민규동: 그 당시 이영진 배우는 정말 멋졌어요. 현실에 없는 것 같은 느낌도 있었고, 독특했어요.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지만 지금 다시 보아도 여전히 눈을 떼기가 힘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이미지가 느껴집니다. 이래서 깊이 반했었구나 생각이 드네요. 감격스럽습니다.

 




장성란: 저도 GV 준비를 위해 영화를 다시 보았는데, 촌스럽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어요. 사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가 민규동 감독님께는 첫 장편 영화 연출작, 이영진 배우님께는 연기 데뷔작이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인들이 채워 넣기 어려운 노하우로 만들어지는 것들, 신비한 이미지와 분위기가 영화를 채우고 있어요. 배우들의 연기 경력이 많지 않은데도 뿜어내는 아우라로 가득 차있더라고요.


민규동: 말씀드린 것처럼 우연과 필연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느낌인데요, 예를 들어 시은과 효신이 지붕에서 노는 장면 같은 경우, 복도에서 촬영을 하던 중 본 그날의 하늘이 너무 멋지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배우들을 지붕에 올려보내고 그냥 가서 자연스럽게 놀아보라고 이야기했어요. 카메라는 밑에 있었고요. 그렇게 해서 배우들이 알아서 놀았고, 그 본질적인 자연스러움이 남겨진 장면이라고 할까요? 제 기억은 그런데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영진: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옥상 장면은 시나리오에 없었고, 저희는 그것이 찍히고 있는지 몰랐어요. 촬영하고 있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왜냐하면 당시 감독님들은 옥상에서 무언가를 찍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PD님은 찍어서는 안 된다고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일단 올라가서 놀고 있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희가 이해한 것은 어른들끼리 이야기해야 하니까 너희는 올라가서 쉬어였어요.


민규동: 위험하니까, PD님은 못 올라가게 했죠.


이영진: 그러니까 저희는 어른들이 밑에서 이야기해야 하니까 너희는 올라가서 좀 쉬고 있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거죠. 사실 당시 이 영화 자체가 당시의 시스템에서는 찍힐 수 없는 영화였거든요. 저희가 시나리오대로 완성도 있게 연기할 수 있는 배우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현장에서 바뀌는 부분이 많았고, 애초에 시나리오 대로 촬영하지도 않았고요. 당일 아침마다 무엇을 찍을지 모르는 현장이었어요. 그래서 쉬어라는 말이 당연히 어른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는 말인 줄 알고 그냥 옥상에서 놀고 있었던 거죠. 그 장면이 정말 연출이 아닌 것이, 박예진 배우가 극 중에서 굉장히 여린 캐릭터고 저는 그와 상반되는 이미지의 캐릭터였는데 실제로는 예진씨가 저보다 훨씬 힘이 셌어요. 그래서 그 장면을 보시면 예진 배우가 극 중 캐릭터와 다르게 이상한 춤을 추며 저를 때리기도 하거든요. 저희는 정말 평소대로 놀았던 거죠. 그렇게 한참 놀다가 내려오라고 하셔서 아 이제 촬영하나 보다하고 내려갔어요. 그 이후에 편집실에서 그 장면을 보고 저 장면이 왜 저기에 있나 싶었죠. 기자님께서는 캐릭터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제 입장에서는 과찬이고, 감독님들께서 캐릭터를 잘 잡고 인물에 맞는 컷들을 잘 배합해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20년 동안 많은 분들께서 옥상신을 좋아해주실 때 저는 혼자 그 장면으로 이렇게까지 사랑받아도 되는 것인가?’하는 죄책감도 있었고요.(웃음) 20년이 지났으니까 저도 이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싶습니다.


민규동: 아주 즉흥적인, 다큐멘터리 같은 이미지죠. 실제로 영화 촬영이나 편집의 메커니즘을 전혀 모르는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컷포인트에 대한 계산도 못했어요. 다시 찍을 때 쓸 장면인지 안 쓸 장면인지 소통하며 찍지도 않았기 때문에 사이즈의 개념도 몰랐고요. 그래서 클로즈업 샷을 찍을 때 온몸으로 연기를 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계산되지 않은 이미지를 영화 안에 잘 담으려고 많이 애를 썼던 것 같아요.


이영진: 사실 그게 촬영 당시에는 그렇게 원망스럽더라고요. 그때는 풀샷, 바스트샷, 클로즈업의 개념이 없으니 풀샷을 찍고 ‘OK’가 나왔는데, 칭찬을 해주시고도 계속 똑같은 것을 반복해서 촬영하시는 거예요. 어린 마음에 좋다고 이야기하면서 계속 같은 연기를 주문하는 감독님들을 조금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민규동: 귀가 얼마나 간지럽던지요.(웃음)




 

장성란: <여고괴담>(1998) 첫 편이 흥행을 한 뒤에 여자고등학교라는 한국적 공간 속 폭력이나 위태로움을 공포영화의 소재로 쓸 수 있다는 발견이 있었고, 한국 영화에서 흔치 않았던 속편이 만들어진 것이잖아요. 그런데 이야기가 이어지는 개념이 아니라 여고라는 공간의 특성을 공포영화로 연결한다는 컨셉만 이어가고 독자적인 이야기를 하는 시리즈죠한국 영화에 없었던 기획이었어요. 감독님께서 여고괴담이라는 시리즈 영화를 맡은 후 당대 여고생들이 느꼈던 불안이나 위태로움, 폭력을 공포영화로 끌어올 때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아요. 그 중에서도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연인을 둘러싼 색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학교 사회의 획일성 같은 것을 어떻게 소재로 생각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민규동: 그 당시에는 공포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여고괴담>을 사실 재밌게 보지는 않았어요연출을 제안받았을 때도 PD님께 "1970년대 일본 괴담 시리즈를 카피한 영화가 한 번 흥행했다고 속편을 만드는 충무로의 안일한 기획그런 것 좀 그만두셨으면 좋겠다." 말씀드렸어요.(웃음) 영화감독으로 살 계획도 없었고, 관련된 꿈도 없었고, 그저 창작하는 것 자체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업영화에 대한 욕심이 없었던 거죠. 데뷔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속편? 그릇이 너무 못생겼잖아.’하는 자만이 있었고요. 이후 일주일 정도 고민을 했어요그런데 그때 'Y2K'라고 2000년대는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속설, 브라질 엘니뇨 현상 등 세기말의 속설들이 많이 있었어요. 문득 죽을지도 모르는데 물질의 흔적을 남겨놓자는 생각이 들어 다시 PD님을 만났습니다. 두 가지 협상을 했어요. 첫째는 전편의 배우와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겠다는 것이었어요. 둘째는 영화의 제목을 여고괴담 2’가 아니라 두번째 이야기로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PD님은 이 부분을 받아들이면서 그래도 세 번은 무섭게 놀라게 해달라고 하셨어요. 영화에 등장하는 피아노 귀신이나 사물함 장면 같은 장치들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써 노력한 부분이었습니다

, <여고괴담>괴담에 방점을 찍었다면, 나는 여고’에 방점을 찍겠다고 말했어요. 더불어 그 당시 입시 위주로 학생을 괴롭히는 선생님이 얼마나 악의 축인지, 학생들은 얼마나 입시에 시달리는지와 관련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저는 이 영화에서 입시에 시달리는 학생은 아무도 없다는 전제를 했어요. 제가 학생들을 바라볼 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거든요. 저희의 화두는 아시아에서 10대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것을 첫 번째 시놉시스의 카피로 썼어요. 당시 청량리 아파트 18층에서 여중생 두명이 동반자살을 했는데 어른들은 원인을 학업 비관, 폭력, 가정문제처럼 맨날 존재하는 타이틀로밖에 이야기를 못했어요. 학생을 시혜적으로만 바라보고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만 보니까 10대 여성으로 살아갈 때의 고민들을 포착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을 여성으로 바라본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들은 무엇이 무서웠을까를 고민했어요. 두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랑을 할 때, 그리고 한 사람이 죽었을 때 자신은 가해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집단적 무의식의 폭력이 무서웠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보여주자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첫 번째 영화가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낡은 학교, 밤에 일어난 죽음 같은 것을 보여줄 때 우리는 모던한 학교의 모습, 그리고 대낮, 모두가 목격한 죽음, 핸드헬드 기법 등을 통해 기존의 공포영화 문법을 전복적으로 바꾸어보고자 했어요. 그 당시, 20세기 말의 현실과 맞닿은 지점에서 공포를 찾아보자며 야심차게 시작했던 것이죠. 이 영화가 불균질적인 이유는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함께 시작을 했지만 제작하는 과정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키스신도 빼라는 말을 계속 들었어요. 지금도 상업영화를 할 때 부딪히는 많은 문제가 그때도 있었고, 이로 인해 시나리오도 75페이지에서 42페이지로 줄어들었어요. 그러니까 논리도 이상하고 정확한 이해도, 설명도 되지 않으니 촬영 중 어려움이 있었죠. 저는 콘티를 통해 잘린 시나리오를 계속 복원해나갔어요. 배우들 입장에서는 어른들의 비즈니스 상 발생한 문제들이 어떻게 정리되는지 모르는 채 어렵고 힘들게 촬영한 것이죠.

 




장성란: 이 영화를 20년 만에 다시 본 20세기 사람으로서 이런 느낌이 들어요. 이것은 1999년에 만들어진 이야기죠. 그 시절의 뉴스나 학생들의 고민이나 감성을 굉장히 현실적으로 잘 담고 있어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렇게 솔직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된 10대 여성의 이야기는 이전에도 없었고, 현재까지도 없는 듯이 느껴집니다. 소재적인 측면뿐 아니라 학교나 사회에서 그들이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 이렇게 세련되고 담백하게 묘사한 영화가 한국 상업영화에 없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지금에도 동시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가 두 분께는 지금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이영진사실 저에게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는 죄책감이 많은 작품이에요. 이 작품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그때는 모든 감독님들이 당연히 민규동, 김태용 감독님 같은 줄 알았어요. 그때는 감독님들도 어렸고 젊은이들이었는데 제겐 어른이었으니 당시 원망을 많이 했어요. 현장에서 대사를 만들 때도 예를 들자면 "자, 여기서 예진이랑 둘이 싸워봐."라고 말씀하시고 모르는 것을 여쭤보면 "네가 시은이잖아, 네가 더 잘 알지." 이런 식이였던 거죠. 그러다가 나온 대사 중 하나가 "난 네가 창피해"였어요. 19살 이영진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말이었죠. 여담으로 시은과 효신이 결혼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있잖아요, 그 장면에서 케이크를 던지는 대목이 있어요. 저희는 그때 현장에서 누군가의 생일이어서 케이크가 있는 줄 알고 배우들끼리 그걸 몰래 먹었어요. 영화 소품 케이크 3개가 있었는데 몰래 먹겠다고 구석을 파먹은 거예요. 스태프분들한테 엄청 혼나고 감독님들은 한숨쉬고 계셨어요. 저희는 그게 소품이라고 생각도 못 했어요. 무슨 내용인지를 몰랐으니까요

그리고 실제로 제가 이런 장면이겠거니 예상하고 연기한 장면이 거의 없어요.(웃음) 제 입장에선 제가 생각한 것과 너무 다른 영화였고, 그래서 이 영화로 많은 사랑을 받을 때 너무 죄송한 거예요. 저 역시 미숙했고 은연중에 감독님들의 속을 많이 썩였을텐데 이런 사랑을 받는 게 타당하지 않다고 느꼈어요. 또 어린 마음에 나를 미워하기 힘드니까 상대를 미워한 거죠.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들도 많다보니 세상이 저를 뒤틀어지게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 당시에는 좋은 감독님들과 좋은 현장에서 좋은 작품을 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스스로가 조금 밉기도 했었던 것 같아요.


민규동: 놀이터를 잘 만들어 주고 어떤 놀이를 하고 있는지 배우들이 스스로 잘 알게끔, 그 방향으로 함께 가게끔 하는 것이 감독의 덕목인데, 저와 김태용 감독도 어렸고 상황도 좋지 않았고 예산도 적었죠. 말씀하신 장면도 케이크가 한번에 안 떨어지면 NG가 나잖아요. 제작부가 3번 만에 오케이를 내야 하는 상황이라고 케이크 세 개를 사온 거예요. 그런데 일단 연출부 한 명이 연습하다가 하나를 망가트렸어요. 배우들이 그걸 파먹고 있었고, 한 번은 엔지가 났어요. 마지막 한 개를 가지고 한 번은 떨어지는 걸 받았고 마지막으로 시도하여 오케이가 났습니다. 이것이 말씀드린 우연과 필연이 만든 기적과도 같은 부분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박예진 배우가 외우는 시에 대한 에피소드도 있는데요, 그런 시를 영화에서 읽는다는 것 자체가 조금 이상하잖아요. 당시에는 더 그랬고요. 예진 배우가 장난인 줄 알고 안 외워온 거예요. 전날에 이영진 배우도 "에이, 감독님 이거 진짜 찍어요?"하고 장난을 쳤거든요.


이영진: 정정할 것이 있습니다.(웃음) 당시에는 감독님도 어린 저희를 놀리는 재미가 있었던 거죠. "이거 찍을 거야"하고는 찍지 않은 것이 많았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시면서요. 정말 찍는 줄 알고 준비하면 안 찍은 것들이 많았어요. 저희는 각자의 캐릭터도 잘 몰랐으니까 더 헷갈린 거죠. 그 시도 ‘누가 있고, 없고그런 이상한 시니까 저희끼리는 이거 안 찍을 것같다, 찍는다 해도 감독님도 못 외울 거다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외우지 않고 간 건데 찍는 바람에 예진 배우가 굉장히 속상해했죠.

 




관객: 교환일기를 어떻게 만들어낸 건지 궁금합니다. 또 영화에 나오는 시도 어떻게 만든 건지 궁금합니다.


민규동: 교환일기는 로케이션 헌팅 당시 교실에서 우연히 보고 발상을 하기 시작했고, 당시엔 현재의 프로덕션 디자이너 같은 개념이 없어서 미술담당 스태프분이 혼자서 다 만들어요. 일반적으로 교환일기로 그런 아트웍을 하지는 않죠. 하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교환일기는 효신 캐릭터의 사랑의 깊이나 집착의 정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특별한 방식, 사회화를 거부하지만 어른들보다 훨씬 깊은 세계가 있는 캐릭터의 특성 등을 바탕에 두고 만든 것입니다. 실제로 자세히 살펴보면 시은이의 성의 없는 답장들도 있어요. 일반적인 교환일기 같은 답장이요.

영화 속에 나오는 시의 경우, 연안이의 시는 제가 헌팅 가서 본 교환일기에 실제로 있던 시를 응용한 것입니다. 효신이가 외우는 시는 제가 하이텔 동호회 친구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써 내려간 시인데, 그 시가 영화와 주제적으로 잘 맞아서 썼죠. 제작사 측의 반대로 삭제되었다가 다시 올리기를 반복하다가 막바지에 겨우 복원한 시입니다. 그 시도 이런 세계에서 아무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효신이라는 인물이 가진 특별함을 보여주고 싶어서 썼습니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시는 학교 내의 괴담을 활용해서 만들었고, 헌팅을 갔을 때 실제로 고등학생들이 수다를 떨던 내용을 반영했습니다.

 


관객: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Ultimate Edition DVD를 너무 구하고 싶어서 중고 거래 사이트를 엄청나게 뒤져보았는데 구할 수 없어서 감독님께 한 번 여쭤보고 싶고요, 촬영 계획이 되어있던 여고 학생분들께 학교의 모습을 찍으라고 했다가 촬영이 중단될뻔한 적이 있었다고 하던데 정말인지 궁금합니다.


민규동개봉 당시에는 20세기라 DVD 개념이 없었어요Ultimate Edition DVD는 시간을 두고 나온 것이고, 제가 작품을 마치고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던 당시 삭제판과 인터뷰를 모두 복원해서 만들었어요. 디스크 6개짜리 버전을 다시 작업해서 만들었죠. 순식간에 동났고 제게도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네요.


이영진: 저도 없습니다.


민규동: 기회가 된다면 더 만들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촬영 관련 에피소드를 말씀드리면, 제가 시나리오 작업 이후, 보다 생생하게 여고의 모습을 그리려고 여고에 찾아가서 같이 생활을 해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는데 거절당했어요. 그래서 당시 경복여상의 연극반 친구들을 섭외해 카메라를 줄 테니 너희의 일상을 찍어서 스케치해봐, 수업시간에도 몰래 찍어보고.’ 이야기했는데 그 친구가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수업시간에 선생님을 몰래 찍다가 걸린 거예요. 학교에서 연락이 와서 한바탕 뒤집어진 사례가 있었죠. 그 친구들과는 이후로 연락이 두절되었지만 당시 만났던 친구들의 실제 이름인 연안, 지원을 감사의 의미로 영화 속 캐릭터의 이름으로 썼어요. 이름은 영원히 남아있으니까요.

 





관객: 김태용 감독님과 공동 연출을 했는데 부딪힌 지점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민규동: 김태용 감독과는 영화 아카데미 시절부터 작업을 함께 했어요. 저희가 여러 가지로 잘 맞았어요. '덤 앤 더머'라고 불렸고 서로 상대방이 더머라며 많이 싸웠거든요.(웃음) 저희가 암묵적으로 했던 역할분담은 김태용 감독이 거시적으로, 제가 미시적으로 보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김태용 감독이 망원경이라면 저는 현미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관객: 극중 효신과 시은의 공기가 너무 좋았어요. 연기를 하면서 박예진 배우님과 연기 외적으로도 의지가 많이 되었을 것 같은데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이영진: , 그런 것들은 지금도 있어요. 예전처럼 안부를 자주 묻지는 않지만 제 배우 인생의 처음을 되돌아봤을 때 늘 제일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에요. 언제나 응원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비단 박예진 배우뿐만이 아니라 김규리 배우도 그렇고 공효진 배우도 그렇고 김재인 배우도 그렇고, 모두 어디선가 본인의 삶을 잘 살고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응원하고 있습니다.

 


관객: 이영진 배우님께서 촬영 당시에 생각했던 영화와 실제로 본 영화가 달랐다고 말씀하셨는데, 촬영을 할 때 어떤 영화를 상상했는지 궁금합니다. 감독님께 여쭙고 싶은 것은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개념이 없었다고 말씀하셨는데 당시의 포스터를 보고 너무 세련되고 신선해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어요. 영화 이미지를 어떻게 만들어 낸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영진: 우선 어떤 영화일 것이라고 상상을 한 것 조차 없었어요. 배우가 꿈인 적도 없었고 연기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몰라서 제가 화면에 어떻게 나올지도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주어지는 무언가가 있으면 그것에 대해 최선을 다할 생각만 있었던 것 같아요. 아까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했지만 아무 것도 모르던 제가 지금까지 배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영화로 데뷔한 덕이였다고 생각해요. 그다음 작품부터는 시나리오 대로, 콘티북 대로 영화를 찍더라고요.(웃음)  이 영화는 필름으로 촬영했는데, 촬영한 필름의 양으로 보면 영화 두 편은 거뜬히 나올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봤을 때 그 촬영본은 어떤 장르로도 편집이 가능했어요. 학원물도, 재난물도 나올 수 있었어요.(웃음) 그래서 편집실에서 처음 봤을 때 더 놀라웠던 것이고요.


민규동: 당시 제게 레퍼런스는 있었어요.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1997)였습니다. 시놉시스를 쓰던 당시에 이 영화의 부제를 해피 투게더라고 잡았었고요.  그 당시에 크쥐시토프 키에슬로브스키가 제겐 마스터였기 때문에 <세 가지 색: 블루>(1993)의 줄리엣 비노쉬를 보라고 부탁을 많이 했습니다. <메이드 인 홍콩>(1997)이라는 폭발할 것 같은 10대의 살아있는 에너지를 담은 영화도 참고를 했습니다. 키에슬로브스키 영화의 정서에 밀착하는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심리적 미장센을 레퍼런스로 많이 삼았고, 당시에는 끝없이 이미지와 사진과 그림을 천착했습니다. 서사나 드라마가 불규칙적이고 이미지가 더욱 강렬히 남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관객: 동성 키스신으로 인해 여론이 안 좋았던 것으로 기억을 해요. 어찌 보면 퀴어 코드에 대해 사회가 불편한 시각을 많이 보이고 있는데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가 개봉했을 때 주위의 우려나 좋지 않은 반응은 없었나요?


민규동당연히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유니텔을 쓰고 있었는데 공포영화에 자도 모르는 민규동은 자폭하라는 보내주신 메시지가 너무 감사해서 캡처를 했습니다.(웃음) ‘영화 아카데미 해체해라라는 항의 메일을 받기도 했고요. 당시는 입소문이나 반응을 극장 화장실이나 엘리베이터에서 확인했는데, 두 부류의 관객이 있었습니다. 영화가 12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개봉을 했고 <러브레터>와 함께 극장에 걸려 있었어요. ‘공포영화 싫어. 다른 거 보자.’는 부류와 이 영화 하나도 안 무섭대. 다른 거 보자.’는 두 부류가 있었어요.(웃음) 그래서 전편에 비해서 관객이 많이 들지는 않았죠. 전편을 능가하는 공포라고 마케팅을 했었거든요.(웃음) 하지만 놀라운 경험의 순간도 있었어요. 당시 처음으로 영화의 홈페이지가 생겼어요. 익명으로 영화 감상을 쓸 수 있는 시대가 온 거죠. 혁명적이었습니다. 게시물도 많이 올라왔고 N차 관람 인증도 있고. 게시물이 많이 쌓여서 그것을 제본해서 책이 3권 나오기도 했어요. 오프라인 모임에서는 박예진 배우가 읊었던 시를 암송하는 대회도 있었어요. 개봉 3주년까지 그들과 만났던 기억이 있네요.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분은 제 대학 후배분인데 영화를 보고 저를 찾아왔어요. 결혼을 앞둔 친구였는데 파혼하고 커뮤니티에서 만난 레즈비언 친구와 함께 살기로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결심을 했어요. ‘영화감독으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하고요. 그전까지는 스스로를 감독이라고 칭하지도 않았어요. 그저 연출을 하는 사람이라고, 그 행위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어요. ‘영화가 어떤 사람의 삶을 조금은 다르게 할 수 있구나. 영화를 함부로 만들면 안 되겠다. 어떤 종류의 인생의 자양분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때 프랑스로 영화 공부를 하기 위해 유학을 갔어요. 저는 당시 호모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것에 대한 반응 자체가 너무 좋았고, 오히려 제작 과정 중에 이 화두를 이해받지 못하는 슬픔이 더 컸어요. 키스했다가 퇴학당한 레즈비언 여고생의 실화를 가지고 95년에 만든 <허스토리> 단편이 있었기에 지금 이 시대에 이 화두가 왜 필요한지, 특히 여고생을 통해 어른들의 방식의 성장을 거부하는 이야기가 왜 필요한지 확신이 있었기에 그것을 뚫고 나가고 싶었어요. 이런 것을 제작사나 배우들에게 이해시키지 못하는 것이 더욱 어려웠어요.


이영진: 저는 패션모델로 데뷔를 했잖아요. 데뷔하자마자 싱가포르에서 활동을 1년 정도 했고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갖기 이전에 이미 생활 속에 그들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물음표가 없었거든요. 이 영화를 촬영할 때 키스신도 있고, 대사들을 보면 레즈비언이 맞는 것 같은데, 동성애 맞는 것 같은데, 감독님께 여쭤보면 늘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우정보다 훨씬 더 깊은거라고 말씀하시니까 오히려 의문이 있었어요.(웃음) 감정적으로 제가 이해를 못 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죠.

 


관객: 영화 속에 나오는 거북이 소녀의 장치와 거북이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민규동: 영화 속에 동물이 많이 나오죠. 사슴도 나오고 죽은 새도 나오고요. 물을 양수의 이미지로 잡고 그 이미지를 활용하려고 했어요. 계속 갇힌 채로 학대당하는 동물의 이미지를 갇힌 학생들, 답답한 학교 시스템을 표현하는 데에 활용을 했어요. 당시에 이지메’, 왕따 당하는 학생의 캐릭터를 넣고 싶었어요. 그 친구를 유일하게 효신이를 바라볼 수 있는 친구로 활용을 했고요. 자료조사를 하던 중에 학교에서 거북이를 키우다가 선생님께 야단맞은 학생의 이야기를 보고, 대화할 사람이 없어서 거북이와 대화하는 인물을 만들었어요. 거북이가 밟힐 것 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탈출하는데 효신이가 모두를 가둬놓고 괴롭힐 때 그 친구는 유일하게 탈출하는 맥락으로 사용했습니다.

 




관객: 90년대의 영화를 보면 지금으로써는 이해가 되지 않는 감성이나 맥락들이 많은데,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에는 그런 지점이 없는 것 같아요. 그때의 고민들이 현재에도 유효한 느낌이 있어요.


민규동: 당시 배우들에게 키스신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해줄 수 없었던 것도 제작사에서 계속 반대했기 때문이었어요. 그것이 지금은 엄청난 탄압 속에 삭제될만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큰 맥락에서는 소수자가 살아갈 때 부딪히는 현실의 벽, 집단적으로 누군가를 따돌리는 행태, 그리고 가해자들의 뻔뻔함, 이해받지 못하는 고독, 또 고독을 맞이했을 때 믿었던 단 한 명에게 외면당할 때의 감정, 몸무게와 키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나의 성장과 같은 화두는 지금도 청소년들이 맞닥뜨리는 것이겠죠. 저항하고 싶은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답답함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으니까요. 영화 속에 흐르는 화두가 아주 느린 진보 속에 천천히 발전되고 있으니까 동시대의 접점들이 계속 보이는 것 같습니다.

 


관객: 20년 만에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게 되어서 너무 반갑습니다. 영화 속에 교환일기를 회수하는 손이 있더라고요. 누가 회수를 한 것이고, 회수를 한다는 행위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민규동: 그 손은 ‘어린 효신입니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어린 효신이 있어요. 크레딧에도 있고요. 촬영은 했는데 모든 장면이 편집된 것인데요, 효신이는 과거사가 있어요. 어린 효신의 설정 중 저지레라는 설정이 있었고, 계속 주변에 나쁜 일이 일어나서 그것이 자기 탓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캐릭터예요. 숨바꼭질을 하다가 첫 생리를 하는데, 충격에 움직이지 못하고 아무도 나를 찾아주지 않은 채 밤이 흘러가는 어린 효신의 이미지가 있었고, 영화 속에서 그 아이가 나타나서 민아를 괴롭히는 맥락이 있었어요. 민아를 통해 내 죽음을 상징적으로 기억해달라는 메시지를 계속 전달하는 것이었어요. 감독판에는 이렇듯 굉장히 복잡한 감정선들이 많습니다. 논리적으로는 더 엉키더라도요.


 

관객: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 선생님이 자살을 하는데, 선생님과 효신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한 건지, 어째서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민규동: 임신을 했을 수도 있고 사귀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타인의 관심은 그 부분에 집중되어 있을수도 있지만, 저는 거기에 대해서는 정답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고요. 사실 그 부분은 저에게 맥거핀에 불과했어요. 영화에서 선생님은 억압적이지 않고 소통이 되는 존재로 표현하고 싶었고, 그래서 학교 밖에서 효신과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죠. 외로운 사람들끼리 친구가 된다는 맥락이 있었습니다. 참고로 선생님 역할의 백종학 배우님은 사실 프로듀서예요. 그 역할의 후보가 당시 두 분이었어요. 백종학 프로듀서와 설경구 배우님이요. 당시 설경구 배우는 영화 <박하사탕>(1999)을 준비 중일 때였죠. 매력적인 배우였지만 강하고 섹시한 이미지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백종학 배우와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관객: 저는 개봉 당시 8살이었어요. 혹시 저 같은 어린 연령의 관객들을 위해 재개봉이라던지 블루레이 출시 예정은 없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민규동: 블루레이에 관련해서 제작사분들께 여쭤볼 순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살 분들이 많아야 하니까요, 수요 조사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1000장 정도 사주실 수 있는지요.(웃음) '씨네2000' 대표님께 메일을 좀 많이 보내주세요.(웃음)



 



관객: 삭제된 내용에 대해서 말씀을 많이 해주셨는데, 지금 생각해보았을 때 감독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어떻게 끝을 맺게 될지 궁금합니다.


민규동: 돌이켜보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싸움들이 있었고, 신인감독으로 유실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이 10년 넘게 제 가슴을 굉장히 아프게 했는데요, 결국 지금의 영화가 감독판인 것 같아요. 그 많은 조건과 선택 중 이것이 최선이었던 것 같고요. 삭제된 장면들이 확장판이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감독판이라고 정리하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아요. 내가 낳은 아이인데 내 아이 같지 않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도 많은 것처럼 이것을 내 영화, 내 인생과 맞닿아있는 영화라고 인정하기까지는 사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10년 정도가 지나고 조금 거리가 생긴 이후부터는 관객으로써 이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어요. 그래서 오늘 다시 영화를 볼 때에는 부끄럽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어요. 예를 들어 서울우유를 들고 가는 장면이 있는데, 저희 크레딧에 보시면 PPL에 남양유업이 뜨거든요.(웃음) 이렇게 말이 안 되는, 어떤 상처의 적산이 엄청난 영화인데,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지점들이 저에게 아직도 영화가 뭐지?’하고 질문해준다는 것이 너무 기쁘더라고요. 그래서 질문을 던져주는 지금 버전이 최선인 것 같아요. <끝과 시작>(2013)이라는 영화가 있었죠. ‘효신과 시은이 만약 죽지 않고 살아서 나중에 다시 만났다면?’이라는 느낌으로 만들어본 영화가 <끝과 시작>이라는 영화였어요. 그 영화를 찍고 완전히 이 영화를 놓아주고 후회나 미련이 없이 지금을 최선으로 간직하게 된 것 같아요.


이영진: 개봉 이후로 오늘 영화를 처음 봤어요. 모두 다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 영화에 대해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더라고요. 묘한 마음인데, 스크린 안에 있는 시은이가 저이면서 제가 아닌 것 같았어요. '20년이 지난 이영진을 박제된 19살의 이영진이 응원해주는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아요. 사실 이 영화를 하고 나서 한 4,5년간은 내가 왜 배우를 해야 하는지 의문점이 많았어요. 시작할 땐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세상살이라는 게 그렇게만 흘러가는 게 아니니까 이런저런 부침이 많이 있더라고요. 연기만 생각해야 하는 바닥도 아니고요. 마음고생을 조금 했어요. 그래서 오히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피한 것도 있어요. ‘나를 왜 이렇게 힘든 시장에 내던져놨지?’하면서요. 그런데 저도 한 10년 정도 지나니까 당시의 저는 최선을 다했고, 물론 부족하고 미흡했지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저 때 이상 잘 할 자신이 없어요. 19살의 이영진을 몰래 보고는 싶었지만 공개하기는 조금 창피했어요.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이상하게 창피하면서도 응원 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고 좋네요.


민규동: 잘 살아남았구나 생각이 들어요. 영화의 영어 제목도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잖아요. 17세기 수도사들이 아침마다 하던 인사인데, 당신도 곧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이에요. 언제든지 죽을 유한한 생명이기 때문에 우린 지금 이 순간 무조건 행복해야 하고, 우리의 행복을 가로막는 관습과 선입견과 억압적인 시스템에 저항해야 우리가 더욱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맥락의 말인데요, 20년 동안 살아서 이런 순간이 왔다는 것이 상당히 감격스럽습니다. 시간 내서 이 먼지 묻은 영화를 보러 와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하고, 우연히 영화감독을 선택해서 꾸역꾸역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는 제게도 너무 큰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시선들을 보니 영화를 더 잘 만들어야겠다고, 더 정진해야겠다고, 더 열심히 살아남아서 더 좋은 영화를 만들어서 보답해드려야겠구나 생각이 듭니다. 오늘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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