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 한줄 관람평


이지윤 | 숨 막히게 마음을 짓누르는

조휴연 | 때로는 크게 엇나가는 의지

이가영 | 행사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잠재성

김신 | '리얼한소재와 장면의 매혹을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이유

남선우 | 인물이 고립될수록 의미가 확장된다





 <프레스> 리뷰: 누가 기계를 고칠 것인가




*관객기자단 [인디즈] 남선우 님의 글입니다.





그가 갇힌 '마법의 성'


누구도 동전을 소중히 대하지 않는 시대지만 영일에겐 동전이 필요했다. 그는 동전으로 버스비를 계산했고, 동전을 넣고 노래를 불렀다. 동전이 들어갈 수 있는 구멍 만큼이 사회가 그에게 허락한 공간인 것 마냥 <프레스>는 시작과 함께 동전을 쓰는 영일의 모습을 비춘다. 비좁은 동전 노래방에서 영일이 홀로 부르는 노래는 마법의 성이다.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꿈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 걸. 언제나 너를 향한 몸짓에 수많은 어려움뿐이지만이라고 노래하는 그의 음성은 꾸밈이 없다. 꿈꾸는 소년의 목소리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이 노래는 그의 연배를 짐작케 하는 동시에 동전을 애용하는 그의 일상적인 행동들이 단순한 취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언젠가 하고 싶은 나의 옛날이야기


영일은 누구인가. 영일은 왜 사람들이 잘 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가. 관객이 영화에 질문을 던질 때쯤, ‘현수는 영일을 보는 외부의 시선을 대변하고 나선다. 밤거리의 화려한 조명들 아래 어설픈 대화를 이어가는 영일과 현수는 아마도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 사이일 것이다. 현수는 어떻게든 이 대화를 끝내려고 노력하고, 영일은 친구와 한 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어 한다. 그러나 현수는 영일에게 자신에게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하고 떠난다.

현수를 떠나 보내고 영일은 다시 동전 노래방에 자신을 가둔다. 현수를 떠나 보낸 것이 단순히 친구 한 명과의 작별이 아니라는 것은 눈물로 노래하는 그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꺼이 꺼이 울면서 나의 옛날이야기를 부르는 그를 보며 관객은 이중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 친구에게 버림받은 영일이 안쓰럽지만, 도대체 영일이 과거에 어떤 일을 저질렀기에 현수는 몇 마디 나눠보지도 않고 그를 떠나버리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 이중적인 마음은 영화의 초점이 영일에게 맞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펼쳐지는 내내 관객이 영일에 대해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게 만든다.


영일은 현수와의 작별 이후 출소자들의 사회적응을 돕기 위해 일하는 보라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따르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전에도 영일을 찾아온 적이 있지만 영일은 그녀를 피해 다녔다. 하지만 자신에게 전부였던 존재마저 잃은 후였기 때문일까, 영화는 별다른 설명 없이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보라와 영일의 사이를 담는다. 보라의 교육에 따라 영일은 점점 동전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된다. 그는 버스 정류장에 설치된 화면을 읽을 줄 알게 되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전송할 줄도 알게 된다.

관객은 이때 이중적인 두 개의 마음 중 영일을 안쓰럽게 여기던 마음이 조금씩 우세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출소자이기에 낡은 행동들을 보여 왔음을 이해하게 되면서 보라를 통한 그의 사회 적응을 자못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관객은 죄에 대한 인식, 출소자에 대한 거부감을 잠시 접어둘 수 있다. 영일이 자신의 과거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고 보라에게도 그 부분에 있어서 솔직해지고 싶어 한다는 것이 영화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는 영일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 설명되지 않는데, 영일은 보라에게 자신이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음을 고백하고 보라는 그런 영일에게 앞으로의 시간을 약속하며 조급해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보라는 죄인을 포용하고 사회의 일원으로 껴안는 종교의 자비를 실천하려 한다.






나는 문제없어라고 말 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문제는 영일이 그런 보라에게 연정을 품게 되면서부터다. 영일은 자신에게 유일한 존재가 된 보라가 또 다른 출소자 구범과도 사회 적응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자 질투한다. 그는 보라를 미행하고 구범과 실랑이를 벌인다. 실랑이 끝에 결국 영일과 보라가 애정 관계에 있었다는 식의 소문이 나게 되고 보라는 영일에게 크게 실망한다.

현수에게도 보라에게도, 영일은 관계에 있어서 주체적일 수 없었다. 진심을 전하는 적당한 방법을 찾지 못해 가만히 있었던 것인데, 세상은 영일을 몰아붙여 어떤 식으로든 감정을 표현해버리게 했고, 그렇게 그의 감정은 왜곡된 모양으로 터져버렸다. 영일의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영일이 서툴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보라의 입장에서 불쾌함을 느꼈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누구도 영일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에게는 사과를 할 기회도, 진심을 설명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영일을 알기에 기회를 줄 수 있었던 피해자(보라)는 불쾌함 뒤로 숨어버렸고 영일을 모르는 주변 사람들(구범, 경찰, 교회 사람들)은 영일의 20년 복역 경험만으로 영일의 행동을 설명하려 했다.

관객을 계속해서 괴롭히던 두 개의 마음은 이때 정면으로 충돌한다. 관객은 내가 보라라면 어땠을까생각하게 되는데, 자신이 보라였어도 영화 속 보라와 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무력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영일이라는 사회 부적응자를 낳은 것은 영일 그 자체의 문제를 넘어 보라와 같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라를 탓할 수 없다는 감정적 진실을 무시할 수 없기에 관객은 이 충돌을 수습하지 못한 채 그대로 끌어안아야 하는 것인지 헷갈리게 된다.

프레스 기계의 틈에 손을 넣어 자해를 시도하다 공장 사장과도 싸움을 벌이고 마는 영일은 홀로 동전 노래방에 향한다. 음정 박자를 다 무시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많이 힘들고 외로웠지. 그건 연습일 뿐야. 넘어지진 않을 거야. 나는 문제없어.’ 이것이 세상에 대한 영일의 다짐인지 반항인지는 알 길이 없다.




You are my sunshine. My ‘only’ sunshine.


다음 곡으로 ‘You are my sunshine’이 나오지만 영일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이 노래는 보라와의 행복한 시간을 수놓았던 노래고, 그 자체로 자신에게 유일했던 보라를 의미한다. 영일은 가사를 뱉으며 행복을 복기해내기 보다는, 가만히 그 반주를 듣는다. 따뜻한 음악에 맞추어 자신이 낼 수 있는 목소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아니 몰라야 마땅한 사람이 바로 영일 자신인 것처럼 말이다.







신음하는 기계를 돌볼 수 있다면


교회, 고물상을 거쳐 영일이 일하던 공장에서 펼쳐지는 <프레스>의 마지막 시퀀스는 긴장감과 모호함으로 가득 차있다. 영화 내내 싸우던 두 개의 마음을 잠재우고, 관객은 영일의 선택을 잠자코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된다. 공장의 기계들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영일이 부품들과 기름통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관객은 영일이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기 힘들다. 사장과의 실랑이 장면이 영일의 과거에 대한 정보를 던져주긴 하지만, 그마저도 지금 공장에서 영일이 벌이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사장과의 실랑이가 끝나면 시퀀스는 다시 기계의 거친 소음과 영일의 짧은 신음들로 점철된다. 그러다가 급격히 찾아온 <프레스>의 라스트 씬은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누군가는 이를 영일이 자살을 준비하는 행위로 보지만, 사실 이 장면은 영일이 프레스 기계를 고치려는 행위로도 볼 수 있다.

극 초반 영일은 공장의 망가진 프레스 기계로 인해 고생한다. 고쳐보려고도 하지만 비생산적인 일이라며 오히려 제지 당한다. 사장은 네가 고치려 하는 그 기계가 잘라먹은 손이 몇 갠 줄 아냐.’, ‘네가 기계를 고치기 전에 기계가 널 고치겠다.’고 말한다. 이 대사는 사회로부터 배제된, 자신을 고립시키는 사회로부터 도리어 혼자가 되는 법을 배운 영일의 모습을 잔인하게 은유하는 것만 같다.



영일은 몇 번이고 이 기계를 고쳐보려 시도하다 모든 걸 포기한 듯 기계에 자신의 손을 넣어 자해를 해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고장 난 기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조차 자신뿐이라는 것을 인식한 영일의 숭고한 의식(儀式)을 담아낸다. 그렇게 <프레스>의 결말은 이야기 내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 두 개의 마음이 비로소 하나로 용해될 수 있도록 돕는다. 매우 관념적이고 상징적이며 비현실적으로 읽힐 여지도 충분하다. 이것은 사회 문제를 설명하는 원리가 될 수도, 해결하는 방법이 될 수도 없다. 그러나 허구적 이야기가 사회와 인물을 충돌시킴으로써 끝내 어떠한 가치를 제안해야 한다는 믿음이 유효하다면 영화 <프레스>는 매우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그 믿음을 수행해낸다고 볼 수 있다. <프레스>는 무엇보다 이야기를 대하는 그러한 태도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Posted by indiespace_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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