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Review] <미스 프레지던트>: 이해를 넘어선 분석의 시도

by indiespace_은 2017. 11. 6.




 <미스 프레지던트한줄 관람평


이지윤 | Mis 혹은 Miss 프레지던트 박근혜

박범수 | 태극기 집회를 마주한 촌로의 벙찐 표정은 단연 올해의 얼굴!

조휴연 | 다가올 시대에 어떤 사람들의 자리는 없다

최대한 | 그들에게 박정희는 하나님이었고, 박근혜는 예수였다. 무엇이 그들을 종교로 만들었는가.

이가영 | 가난과 무지가 빚어낸 참상

김신 | 영화 속 ‘박사모’들의 전체주의적인 면모보다는(그 부분에 대해 이 영화가 새롭게 알려주는 사실은 하나도 없다.) 이 영화가 피사체를 대하는 조롱에 가까운 태도야말로 아직까지 미제로 남아있는 이 나라의 과제다.

남선우 | 2016년 대한민국판 '우상의 황혼'




 <미스 프레지던트> 리뷰: 이해를 넘어선 분석의 시도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가영 님의 글입니다.



조육형 씨는 매일 아침 의관을 정갈히 차려 입은 채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 앞에서 사배를 올린다. 바짝 엎드려 비장한 표정으로 국민교육헌장을 읊은 후에는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난다. 집회 현장에 도착한 그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단상 위에서 격양된 목소리로 연설인지 험담인지 모를 말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사람을 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집회 분위기에 적응하고 양손에 태극기를 든 채 열심히 구호를 따라하기 시작한다. 조육형 씨는 방송으로 보여지던 ‘박사모’의 모습과는 다르다. 시골에서 소를 타고 다니는 옛날 농부이며, 큰 소리 한번 내지 않는 점잖은 노인이다. 그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태극기를 흔드는 모습은 상당히 이질적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열혈한 박사모이며 박정희를 추앙하는 신도 중 하나다. 과거 새마을 운동 역군이었던 자신의 활약상을 얘기하며 몇 번이고 박정희 정권을 고맙고 좋았던 시절이라 칭한다. 


여기 또 다른 박사모 회원이 있다. 울산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종효 씨 부부는 지갑에 박정희 부녀의 사진을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는가 하면, 식당 벽면은 물론 식탁까지 기사와 사진들로 도배했다. 종종 손님들에게 ‘독재자의 사진을 왜 붙여 놨냐’, ‘보기 거부감 든다’ 같은 소리를 들어도 ‘싫으면 오지 마라’는 생각으로 꿋꿋이 버틴다. 박정희, 육영수 생가를 방문해 여기저기 둘러보며 주변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그들의 표정은 마치 소풍 나온 학생들 같다. 그러던 어느 날,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고 박근혜 탄핵을 외치는 촛불집회가 열리자 부부의 일상도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매일 밤 뉴스를 보고 눈물 흘리며 ‘왜 이렇게까지 됐는지 모르겠다’고 심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박정희는 배고픔과 가난이라는 원초적 불안감을 해결해준 의인이며 항상 감사해야 할 전 대통령이다. 그런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세상으로부터 비난 받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뿐이다. 





관객들은 그간 미디어를 통해 전형화 된 이미지의 박사모와는 다른 모습의 등장인물들을 보며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임을 인지하고는 ‘이해의 범주’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박정희, 박근혜를 옹호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동안 나는 얼마나 객관적이고 편견 없는 삶을 살아왔는가?’ 이 의문은 비단 등장 인물이 평범하기 때문에 시작되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의 전체적인 논조 또한 중도적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더 혼란스럽다.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그토록 숭상하는 박정희 부녀를 역사적 관점에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동상과 사진, 짤막한 흑백 필름으로 비춰지는 박정희 가족의 모습이 전부이다. 다만, 탄핵심판 선고 방송 혹은 야밤에 청와대를 빠져나오는 장면처럼 과거와 대비되는 현재 또한 보여지기 때문에 관객들은 다시 한번 현실을 인지한다. 인터뷰 장면에서는 화자만이 존재하며 질문조차 배제된다. 카메라는 철저하게 관찰자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는 그 어떤 대상도 풍자하거나 조롱하지 않는다. 이로써 감독의 의도는 희미해지고 판단은 온전히 관객의 몫이 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영화가 바라던 바일 수 있다. ‘촛불 세대는 박정희 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가?’


바로 앞 문장에서 주체와 객체는 ‘세대’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너’와 ‘나’ 혹은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는 변화무쌍한 개념이다.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사건의 단면과 시간들이 필요하다. 대상이 누구든 간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설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이해를 넘어선 분석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성과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저 가난과 무지가 낳은 비극으로 치부하기엔 짊어지고 가야 할 것들이 많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