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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_Choice] <고갈>: 모든 것이 소진되어버린 지독한 살풍경

by indiespace_은 2017. 10. 25.




[인디즈_Choice]에서는 이미 종영하거나 개봉으로 만나볼 수 없었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은 독립영화 전문 다운로드 사이트 '인디플러그'(www.indieplug.net)에서 

다운로드 및 관람이 가능합니다.


<고갈> 다운로드 바로가기 http://www.indieplug.net/movie/db_view.php?sq=5





<고갈> 리뷰: 모든 것이 소진되어버린 지독한 살풍경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범수 님의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갈>의 세계는 스스로를 지탱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일 정도로 위태롭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너른 갯벌과 거대한 공단은 한없이 삭막하고 동시에 스산하다. 그 아래에 존재하는 인간들은 서로를 조금이라도 이용하고 착취하기 위해 의자 뺏기 놀이를 하듯 비루한 육신을 아등바등 움직인다. 수퍼 8mm 촬영 원본을 35mm로 확대한 후 인위적으로 손상을 가한 필름은 그 모든 것들을 낡고 거친 느낌의 화면으로 구현했다. 그 어떤 생의 약동도 찾아 볼 수 없는, 모든 기력이 소진되어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잉태되리라는 기대조차 전부 앗아가 버린 살풍경. 그 지독한 허기와 공허감에 절로 몸서리치게 하는, ‘바닥’이라는 표현이 더없이 어울리는 세계. 영화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영화에서 명징한 메시지를 짚어 내는 것은 사실 무의미할 지도 모른다. <고갈>은 무엇보다도 직접 보고 듣고 느낄 것을 관객들에게 요구하는 영화다. 그 어떤 언어적 표현도 앞서 언급한 필름의 질감이 주는 감흥을 온전히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감흥을 언어의 형태로 억지로 변환하는 대신 이야기의 흐름과 인물의 동선을 좇는 것만이 유일한 해답일 듯싶다. 기원도 연원도 알 수 없는 남자와 여자가 갯벌에서 조우한다. 개흙을 흩뿌리던 둘은 모텔로 향한다. 남자는 여자를 매춘에 동원한다. 모든 것은 중국집 배달부가 둘 사이에 끼어들면서 변화한다. 남자 몰래 여자를 만난 배달부는 함께 떠날 것을 종용한다. 여자는 그 말을 듣고 남자를 떠나지만 이내 돌아온다. 그러나 남자가 함께한 시간을 환기하자 여자의 반응은 돌변한다. 여자의 탈출 시도는 남자에 의해 저지되고, 배달부가 여자를 찾아 모텔에 찾아오면서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인물들은 폐곡선을 그리며 끊임없이 폐허 속을 맴돈다. 여자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다시 남자에게로 돌아온다. 남자 또한 여자의 매춘에 의존하며 간신히 삶을 영위한다. 배달부 또한 구원의 전기가 되는가 싶다가도 이내 남자와 여자의 관계 사이에 자리잡고 만다. 남자와 여자와 배달부는 왜 이토록 서로에게 부박하게 기생하는가. 그건 절망만이 가득한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도 딱히 바뀌는 게 없다는 지독한 체념 때문일 것이다. 텅 빈 세계를 마주한 인물들은 너무나도 무기력하다. 끝없이 펼쳐진 갯벌은 그 끝조차 가늠하기 힘들고, 끊임없이 매연을 뿜어내는 공장의 굴뚝들과 둔탁한 기계음을 내며 작동하는 건설 장비들은 그저 무심하게 자리해 있을 뿐이다. 경계 너머를 꿈꿀 자유마저 박탈당한 이들에게는 지금의 현실을 버티어 내는 것조차 사치인 것처럼 보인다.


파국의 양상은 잔혹한 폭력과 기괴한 이미지들의 연쇄 반응으로 전개된다. 가죽 두건을 뒤집어 쓰고 나타난 배달부는 가위로 자신의 배를 가른다. 그 가위는 남자 손에 쥐여져 배달부의 남은 몸뚱어리를 사정없이 난자한다. 남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여자는 가위로 잘라 낸 자신의 유두를 두유 팩 안에 담는다. 돌아온 남자가 여자를 강간하는 순간, 외계 생명체의 기괴한 형상에 가까운 죽은 태아가 여자의 음부에서 빠져 나온다. 간신히 생겨나는 듯 했던 생의 의지는 도리어 희망과 구원의 마지막 가능성을 파괴한다. 자기 파괴로도 극복할 수 없는 무기력의 감정을 대변하는 듯한 불안한 앰비언스가 그 빈 자리를 가득 메운다. 폐허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다시 폐허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폭력과 이미지의 수위보다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일말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답답함이 스크린 밖으로 전이되는 순간이다. 죽은 태아를 부둥켜 안은 여자는 갯벌 위에서 오열하고, 호루라기를 불며 여자를 쫓아 온 남자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앞에 주저앉는다. 여자의 오열을 비추던 영화는 갑작스러운 정적과 함께 암전된다. 짧은 크레딧과 함께 영화가 끝나면, 미처 정리되지 못한 정념이 불순물처럼 남는다. <고갈>이 비추던 살풍경은 이내 우리의 내면을 뒤흔든다. 영화처럼 폭력의 굴레에 갇히지 않더라도, 잠재하는 허무와 무기력이 부지불식간에 파국을 잉태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피어 오른다. 모든 것이 소진된 ‘바닥’에 다다랐을 때, 마주한 절망을 헤치고 나아갈 힘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고갈>은 섣부른 결론을 내놓는 대신 짧고 강렬한 침묵으로 답한다. 그것은 곧 해답이 영화 밖 현실에서 필사적으로 찾아야 하는 것임을 역설하는 나직한 선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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