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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_Choice] <보라>: 이 멍을 보라

by indiespace_은 2017. 7. 12.




[인디즈_Choice]에서는 이미 종영하거나 개봉으로 만나볼 수 없었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은 독립영화 전문 다운로드 사이트 '인디플러그'(www.indieplug.net)에서 

다운로드 및 관람이 가능합니다.


<보라> 다운로드 바로가기 >> http://www.indieplug.net/movie/db_view.php?sq=1604







<보라> 리뷰: 이 멍을 보라



*관객기자단 [인디즈] 송희원 님의 글입니다.



영화 <보라>는 산업안전보건법에 의거해 사업장에서 이뤄지는 현장보건관리 실태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재해를 예방하고 쾌적한 작업환경 조성을 위한 목적으로 마련된 법률이다. 영화는 유해인자에 노출되는 산업 근로자의 모습을 기록하는 한편 수십 년 동안 농사를 지어온 할머니와 인터넷데이터센터 관리자와 하드디스크 데이터 복구 전문가, 사진동호회 사람들을 보여준다. 감독은 언뜻 연관성 없어 보이는 사람들과 풍경을 직조하며 현대 사회의 노동과 여가에 대해 고찰한다.





영화는 전반부 보건기관 직원과 전문의가 사업장을 방문하여 작업환경을 측정하고 근로자를 진찰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작업환경측정이란 작업환경 실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해당 근로자 또는 작업장에 대하여 시료를 채취하고 분석·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도루코 칼, 마네킹, 피아노, 타이어, 채석장 노동자들은 전문의에게 원인불명의 두드러기, 기계소음으로 인한 난청, 고혈압, 근육통 등의 고통을 호소한다. 노동자들의 멍 자국은 건강검진 후에야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이 멍 자국은 매일 노동의 강도가 축적되어 신체에 서서히 새겨진 것이며 지우려면 그 발생의 원인일 생계의 동작을 중지해야 한다. 노동자의 신체적 고통은 의사에게 전문적 용어의 병명으로 진단되지만, 금주와 금연이라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처방이 내려질 뿐이다. 진찰하는 의사도 고통의 원인이 노동 과정에서 발생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생계가 끊기는 것은 노동자에게는 죽음의 선고와도 같다는 것을 알기에 일하지 말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다. 설령 당장 일을 그만둔다 할지라도 멍은 잠복해 있다가 언제 다시 표면 위로 드러날지 모른다. 과거 2년 동안 석면 작업을 했다가 몇 십 년 뒤에서야 후유증이 발병한 노동자처럼 말이다.


“전반부는 육신이 거하는 공간으로서의 공장을, 후반부는 정신이 거하는 네트워크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 전반부가 산업재해로 인한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보랏빛 멍을 보여줬다면, 후반부는 인터넷데이터센터와 하드디스크 복구 기술자를 보여주며 디지털 시대에 현대인이 느끼는 쓸쓸함의 정서를 환기시킨다. 어느 한 인터넷데이터센터 야간 교대 근무 노동자는 텅 빈 사무실에서 혼자 일한다. 네트워크를 관리하고 남는 시간에 디엠비로 예능프로그램을 보고 메신저로 친구와 대화하고 관처럼 생긴 박스에 들어가 쪽잠을 잔다. 하드디스크 데이터를 복구하는 다른 한 노동자는 하드가 높게 쌓인 어둡고 좁은 방에서 홀로 작업한다. 그러다가 잠깐 게임을 하며 온라인상에서 사람들과 접속한다. 기계 소음과 분진이 날리는 앞의 작업장 환경에 비하면, 정보화 기기가 들어선 사무실은 조용하고 신체에 치명적인 유해요인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 환경을 관리하고, 우주라고 표현되는 하드 속 데이터를 복원해내는 노동자들은 고독해 보인다. 그들은 인터넷으로 자신이 어딘가 접속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정서적인 허기를 달랜다.  





가끔 멍을 세게 눌렀을 때 너무 아파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 <보라>는 어떤 장면들에서 내게 지독한 농담을 던지는 것 같았다. 장면 하나, 소음으로 청력을 손실한 노동자가 “지금 약 드시는 거 없으세요?”라는 전문의의 질문에 “그니까 소주 두 병이요”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산업재해 교육 현장에서 재생되고, 그걸 본 노동자들은 웃음을 터뜨린다. 시차를 갖고 발생하는 웃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처럼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의 노동자에게 웃음을 터뜨리는 이 역설적인 상황이 자못 씁쓸하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상황은 영화 후반부 사진동호회 사람들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다시 발생한다. 감독은 청소년 야구단, 수영강습 장면을 짧게 보여주며 연이어 사진동호회의 한 남자를 인터뷰한다. 카메라 기능을 낱낱이 외우며 새로운 기종이 나올 때마다 종류별로 기기를 산다는 남자는 자신의 활동에 “즐거움은 없어요. 결과물 하나 보려고 찍는 거죠”라고 고백한다. 장시간 노동으로 소진되는 삶은 정서적인 불안과 공허함을 불러오고 스포츠나 취미활동에 집착하게 만든다. 현대인들은 여가마저도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소진하는 강박적인 노동으로 대체해 가는 것이다. 





<보라>는 여러 면에서 기존 고발 형식의 다큐멘터리 문법을 비껴간다. 장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의도로 수렴되지 않고 이질적인 장면들이 전방위적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런 설명 없이 전개되는 화면들이 언뜻 당혹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멍을 가까이에서 들춰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화의 성과는 분명해 보인다. 이는 공장 기계 소음에 묻히는 노동자의 말을 담기 위해 화면 안에 잡힐 정도로 가깝게 다가가는 영화 속 붐오퍼레이터의 태도처럼, 감독의 치열하고 끈질긴 응시가 있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영화는 가까이에서 오랜 시간을 두고 포착한 이것을 관객에게 보라 한다. 그리고 이 멍을 이미지의 잔영으로 관객에게 오랫동안 남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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