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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_Review] <삼례> : 길을 잃어버린 여행

by indiespace_은 2016. 6. 29.



 <삼례줄 관람평

김은혜 |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속에 존재하는 듯한 삼례라는 곳

박정하 | 데미안에 푹 빠진 어느 중2의 일기

김민형 | 길을 잃어버린 여행

위정연 | 꿈속을 유영하듯 펼쳐지는 몽환적 이미지와 감정들

김수영 | 채석강 지층처럼 켜켜이 쌓인 비밀과 켜켜이 쌓여가는 궁금증



 <삼례리뷰: 길을 잃어버린 여행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민형 님의 글입니다.


“시네마란 지도에 추가된 또 다른 나라와 같다.” 영화비평가 세르주 다네는 말한다. ‘위대한 여행가’, ‘영화 지도를 그린 유목민’이라고 칭해지는 그는 영화를 본 뒤 글을 쓰는 것이 여행한 뒤 지도를 그리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영화 시나리오 작업은 하나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동시에 그 나라로 찾아올 수 있는 길을 만드는 작업이다. 시나리오는 여행가(관객)가 지도를 그릴 수 있도록 밑바탕을 제공한다. 관객은 영화라는 낯선 세계를 여행한다. 한편, 영화 속 주인공이 무작정 낯선 장소로 향하기도 한다. 영화 <삼례>가 그렇다. 승우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삼례라는 낯선 곳으로 간다. 그곳에서 희인을 만나면서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승우의 여행으로 <삼례>는 길을 만들고 지도의 밑바탕을 그린다. 그러면 관객은 <삼례>라는 “지도에 추가된 나라”에서 무엇을 발견하나.



미로처럼 짜여있는 <삼례>에서 길을 찾기란 어렵다. 주인공 승우도 종종 영화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닭장이 즐비해 있는 시장 통에서 갑자기 바다로 향하고, 희인의 방에 머물다가 뜬금없이 가수 강산에가 노래하는 술집에 간다. 이 여행은 삼례라는 공간에 한정되지 않고 우주까지 확장된다. 은하수, 해와 달을 표현하는 환상적인 이미지가 삼례라는 공간에 이질적으로 삽입된다. 인물이 공간을 이동하는 명확한 이유를 단번에 알아채기 쉽지 않다. 단지 인물의 감정과 꿈,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는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정확한 목적지를 두지 않고 여행을 떠난 사람처럼, 영화는 극적인 정점 없이 여러 풍경 속에서 떠돈다. 어쩌면 그렇기에 주인공을 스치는 많은 지역민의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는다. 현실에 불쑥 등장했다 꿈으로 그치거나, 꿈인 줄 알았는데 현실로 등장한다. 애초에 지역과 공간을 조망하기 위한 영화가 아니라고 느껴진다.



말하자면 <삼례>는 서사와 공간의 인과적 연결을 파괴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물의 특정한 시선에 더 묶이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희인은 승우가 서울에서 온 외지인임을 알게 되자 “아저씨는 구경하는 동시에 구경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승우는 구경하는 위치에 머무를 뿐 일방적으로 구경당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카메라는 승우의 시선을 넘어서 독자적으로 움직인다. 그 누구의 시선도 아닌 쇼트가 배열된다. 이때 삼례의 지역민을 바라보는 쇼트는 명확히 위계를 가지고 짜인다. 일례로, 시장에 초라하게 앉아있는 할머니를 보여준다. 이들은 얼굴을 들어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죽어가는 닭은 계속해서 잔인하게 보인다. 지역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쇼트는 비슷한 방식으로 제시된다. 이와 반대로 승우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인물들은 지역과 동떨어진 분위기를 지녔다. 저승사자 옷차림을 한 남자, 속옷 차림의 여자는 승우에게 시선을 던진다. 이들은 삼례와 동떨어져 존재한다. 



<삼례>는 외지인으로 기능하는 승우와 카메라의 시선에 묶여있다. 지역민은 영화에서 주체적인 시선을 가지지 못한다. 어쩌면 당연하다. 승우가 삼례라는 낯선 곳에 도착하면서 영화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례 지역민으로 제시되는 희인은 어떤 존재인가. 희인도 분명 자신만의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지역민의 이야기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 이유를 인물들이 사용하는 언어에서 찾아본다. 삼례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지역민들은 모두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 그런데 태어나 지금까지 삼례에 살았다는 희인은 왜 정확한 서울말을 구사하나. 단지 서울을 동경해서 그렇다고 넘기기엔 가볍지 않다. 희인이라는 캐릭터는 겉으로만 지역민으로 포장했을 뿐 철저히 외지인의 시선으로 그려졌다. 그렇기에 지역적 색채는 철저히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에 묶여있다. 감독의 의도대로 영화 <삼례>는 삼례의 공간과 역사를 재조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조명의 주체가 항상 지역민이 아니라 외지인이어야 하나. 지역민 스스로 이야기를 그리지 못하고, 외부의 구원자를 통해서 역사와 장소를 조망하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되물어야 한다.



영화라는 ‘나라’에 들어오는 길을 만들 때 굳이 정돈된 길을 만들 필요는 없다. 서사와 공간을 인과적으로 제시하지 않으면서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 그럼에도 과감한 파괴와 생략이 특정한 이미지의 종속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은 우려스럽다. 영화는 여러 사회적 관계를 재설정한다. ‘지방의 식민지화’란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영화 <삼례>는 철저히 외부에 종속된 시선으로 읽혀진다. 이미지 간의 위계는 명확히 존재한다. 지역의 풍경을 곡예 하듯 바라봐야 했나. 지역민은 마치 몰래 찍혀진 것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전시되었어야 했나. 낯선 지역을 여행하는 외지인의 시선을 영화에서 어떻게 그리는 게 옳은 태도일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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